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퍼슨 데이비스 (문단 편집) === 미연합국의 대통령이 되다 === 그 후 그는 [[미연합국]]의 임시 대통령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데이비스는 북부의 연방 정부에 남부 지역에 존재하는 연방 재산과 기존 국가 채무에서 남부의 빚을 지불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오히려 북부로부터 탈퇴를 취소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병합하겠다는 경고만 받는다. 이후 남군이 섬터 요새를 공격함으로써 [[남북전쟁#s-1]]이 발발한다. 전쟁 발발 직후 버지니아 등의 또다른 남부주들이 남부연맹에 가담하게 되자 1861년 11월 그는 정식으로 미연합국(남부)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직무 도중 데이비스는 압도적인 인구와 공업화로 [[먼치킨(클리셰)|먼치킨]]이 된 북부를 이길 만한 전략을 짜느라 상당히 고생했다. 하지만 그의 똥고집[* 대표적인 피해자로 조지프 존스턴 장군이 있다. 존스턴이 남부연맹에 투신한 장군들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데이비스가 자신보다 어리거나 경력이 짧은 장군들이 말 잘 듣는다고 그들에게 높은 계급장을 달아주는 바람에 존스턴과 전쟁 내내 서로 욕하고 싸우게 된다(리 장군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개인적인 악감정은 존스턴이 애틀랜타로 서서히 후퇴하면서도 셔먼의 군대를 우월한 교환비로 계속 이기고 있던걸 못 참고 후드를 임명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리고 후드는 존스턴이 이끌던 테네시군을 이어받고서도 애틀랜타를 사수하기는커녕 불태우고 후퇴하는 추태를 보인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후드를 재신임하고, 다시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테네시군이 후드의 졸렬한 지휘로 재기불능 수준으로 패했음에도 끝까지 존스턴을 재임명하지 않는 뒤끝을 보인다. 결국 존스턴을 종전 거의 직전에 재임명했다. 단 여기에는 존스턴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이 최근 학자들의 지적이다. 방면군 최고 사령관 정도면 어느 정도 정치적인 면도 고려를 해야 하는데, 존스턴은 자신의 부대가 처한 상황과 자신의 궁극적인 계획을 정부에 상세하게 알리고 납득시키려는 소통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아서 행정부의 불신을 자초한 면이 있다.]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 안 하는 성격 때문에 의회나 주지사들과 심하게 대립했고 아랫사람들도 고생을 더럽게 많이 했다. 데이비스는 남부연맹의 자원, 약점 등을 평가한 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방어전 위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남부는 공업을 비롯한 전쟁에 필수적인 물자 수송이 북부에 한참 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앤티텀 전투|때로는 과감하게]] [[게티즈버그 전투|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망했다. 거기다 인사 문제도 그의 골치를 썩혔는데, 앞서 말했듯이 각 주의 권리가 강한 상태였기에 자주 각료가 교체되었다. 각 주가 단합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제각각으로 놀다 보니 승리는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 애초에 연방에서 탈퇴하고 나온 주들의 연합체라는 속성의 특성상 남부연합과 각 주들의 단결력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링컨은 전쟁 한 달 전에 이 사실을 연설로 경고한 바 있다.] 특히 편협함도 너무 심해서 병사들과 정치가들을 상대로는 연설을 했지만 일반 국민들은 무시했는데 그 결과 국민들의 에너지를 결집시키고 남부 민족주의를 고취시켜서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 이러다보니 남부의 서민들은 대통령이 돈있고 힘있는 자들에게만 특혜를 준다고 여겨 그를 혐오하게 되었다. 데이비스는 대통령 연설 때 감동적인 언변으로 사람들의 전의를 고취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운명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달라고만 요구했다. 2달에 걸친 전국순회여행을 제외하면 그는 수도인 리치먼드에 틀어박혀서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부인들은 그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를 알지 못했다. 결국 1863년 4월에 식량부족으로 리치먼드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빈민들이 식량을 찾아서 상점들을 약탈했으므로 데이비스는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해야 했다. 그러다 마침내 [[게티즈버그 전투]]와 빅스버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남부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1865년 4월 3일 [[율리시스 그랜트]]가 이끄는 연방군이 남부연합의 수도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 최후의 공격을 가해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때 데이비스는 도망쳤으나 이내 연방군에게 붙잡히고 만다. 포로가 된 상태에서 [[로버트 리]]의 항복 편지를 받아든 그는 1865년 5월 5일에 항복하였으며 남부연맹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음을 선언했다. 이후 국가에 대한 [[반란|반역]]죄로 같은 해 5월 19일 수감되었지만, 그래도 3년만에 석방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반역죄'''였으므로 [[사형]]을 당해도 모자랄 판에 불과 3년만 옥살이 한 것이다. 이는 북부가 전후 처리에 매우 관대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심지어 수감 중 재판도 받지 않고 3년도 안 되어 보석으로 석방된 후, 이후 사면되었으며 연방정부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로 남은 [[존 C. 브레킨리지]]와 달리 데이비스는 충성 서약도 시행해서 1869년부터 미국 국적을 회복하고 공직에도 진출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반란 수괴' 제퍼슨에 대한 처분이 너그러웠던 건 여러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제퍼슨이 반란 수괴이기는 했지만 [[전범]]은 아니었고[*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이나 수많은 북군 포로가 사망한 전쟁 범죄 앤더스빌 감옥 사건과 제퍼슨을 엮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제퍼슨이 저 사건들에 관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반역죄만으로 중형을 선고하면 오히려 제퍼슨을 순교자로 만들어 긁어 부스럼 만들 가능성이 컸다. 제퍼슨도 본인이 반역죄로 재판정에 서면 이를 기회로 남부의 연방 탈퇴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고, 심지어 반역죄로 기소해도 무죄 판결이 나올 가능성[* 제퍼슨이 남부 연합에 투신한 것보다 그가 몸담고 있던 미시시피 주의 연방 탈퇴가 먼저였고, 때문에 제퍼슨도 더 이상 미국 시민이 아닌 상태에서 남부 연합에 투신하여 대통령 자리에 앉았으니 반역자가 아니라는 논리를 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까지 있었다. 재판을 했다가 만에 하나 무죄 판결이라도 나오면 제퍼슨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 둘째치고, 미국 법정에서 남부 연합의 연방 탈퇴가 합법적이었다는 법리가 나오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질 판이었으니 차라리 사면하는 게 나았다. 제퍼슨 본인은 제법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되어 이후 공무원으로서 관청에서 일하게 되었고, [[1878년]] 연방 직은 아니지만 버지니아 주 상원의원에 다시 당선되어 1884년까지 재직했다. 참고로 데이비스는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민주당에 입당했다. 1878년 이후로는 정치 원로 대우를 받으며 민주당 쪽에 여러 정치적 조언을 했다고 한다. [[미국 남부]]에선 그를 영웅 대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장례식은 남부에서 꽤나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